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1941년 8월에 설립됐다. 3개의 수용소가 여기에 있었는데, 제1 수용소와 제2 수용소는 1941년 사바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겼고 제3수용소는 1945년까지 존속했다. 1945년 4월 폐쇄될 때까지 약 75,159명의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. 이 외에도 크로아티아 정부는 1942년 6월 집시 수천 명을 야세노바츠 수용소로 강제 송환했고 집시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었다. 비록 가스실과 같은 곳은 없었지만, '발칸의 아우슈비츠'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. 특히 [[가톨릭]] 사제들이 [[우스타샤]]에 의해 수용소장이나 교도관으로 선출되어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고 수용소 바깥에서도 우스타샤와 가톨릭 세력들이 영합해서 세르비아인, 유대인, 집시들에게 학살과 함께 공동체 파괴, 약탈, 강제 개종을 실행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.jpg|width=100%]]}}} || ||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(Miroslav Filipović, 1915–1946) || 가톨릭 신부임에도 우스탸샤에 동조해 야세노바츠의 수용소장으로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. 1945년 영국군에 잡혀 1946년 유고슬라비아의 [[베오그라드]]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. 사형을 선고받은 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스테파니츠 대주교.jpg|width=100%]]}}} || ||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(Alojzije Viktor Stepinac, 1898–1960) || 자그레브 대주교이자 야세노바츠를 포함한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자행된 학살, 파괴, 강제개종 등을 최초로 지시한 사람들 중 하나로 지목받고 있다.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의 감옥에서 복역했으나 바티칸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. 그가 죽은 후 1993년 10월 3일 교황 [[요한 바오로 2세]]에 의해 [[복자]]로 [[시복식|시복]]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. 또한 전쟁이 끝난 후 이 학살을 저지른 우스타샤의 전범들은 나치전범들과 달리 대부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.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 갈취한 금품과 재산을 챙겨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남미 국가들로 탈출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